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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 속 미학을 좇는 청춘의 언어들

silin.inspo 2021. 4. 13. 12:39


진은영 시인에 관해 작성한
시인론.


1. 사랑하는 모든 것에게

시인은 솔직함을 사랑한다. <멜랑콜리아>한 ‘비극’에 대한 아름다움, 혹은 유토피아에 대한 사유를 솔직하게 논하기도 하고, <미친 사랑의 노래>에선 자신에 대한 솔직함을 말한다. 그리고 <문학적인 삶>처럼 현실 속 미학을 찾기 위한 솔직함이 담겨있다. 시인의 시를 한마디로 말하자면 혁명은 쓰리고, 사랑은 달콤하며, 청춘은 고통이다. 특히 시인은 ‘사랑’에 대한 관념이 독특하다. 그녀의 사랑과 <연애의 법칙>은 곧 <청춘> 연작이 된다. 시인은 말한다. 연서를 쓰는 이유는 자신이 다른 사람을 사랑하기 힘들어서라고. 그래서 시인은 끊임없이 타인의 사랑스러운 부분을 찾기 위해 노력한다. 그것은 남성에 대한, 그리고 여성에 대한, 또한 모든 이들에 대한 사랑으로 번지게 된다. 그녀는 누군가를 만나면 그 사람의 문제점과 인간적 허약성 때문에 고통받으면서도 시인은 ‘사랑’을 논하고 ‘사랑’을 쓰는 것을 멈추지 않는다고 한다. 시인이란 말도 안 되는, 지옥보다 더 지옥 같은 현실에서 불현듯 아름다움을 찾아 그것을 시로 써야 하기 때문이다.
진은영 시인은 이러한 생각이 기반이 되어있기에, 외려 아름다움을 잔혹하게 그려낸다. 그녀는 오래도록 철학을 공부한 만큼 동서고금의 여러 철학에 대해 깊은 사조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 철학에서 미학을, 미학에서 현실을 보는 시인은 줄곧 현실의 잔혹함을, 정치에의 관심을 <Quo Vadis?>처럼 환기하기도 한다. 저녁은 몹시 어두워지는데, 이제 어디로? (「Quo Vadis?」) 라며 반문하는 시구에선 왠지 모를 섬뜩함이 느껴지기도 한다. 그래서인지 그녀의 시는 마치 언어의 ‘팝업북’ 같다. 시어 하나하나가 헤엄쳐 나와 냄새를 풍기고, 습한 공기를 압도한다. 어떤 때는 향기롭게, 어떤 때는 건조하게, 그리고 가끔은 몹시 지독하다.
진은영의 청춘과 사랑이라면, 시인이 바라보는 날카로운 세상에 공감할 수 있다. 그녀가 솔직함을 사랑한다고 했지만, 표현의 방식이 노골적이지 않기에 사실 좇고자 하는 의미를 독자가 한 번에 읽어내기엔 어려운 편임은 분명하다. 그러나 여러 차례 아름답고, 간지러운 시어를 읊조리다 보면 어느 순간 다른 차원의 세상으로, 그리고 알 수 없는 기시감이 드는 세상에 초대된 듯한 기분이 들 것이다. 그리고 어느 순간 외침이 들린다. 사랑하는 모든 것에게, 허무한 오늘의 일상에게 <우리는 매일매일> 뚜렷한 과일 향을 기억해야 한다고 말이다.


2. 청춘을 절필하다

시인은 이제 청춘을 그만둔다고 했다. 3권의 시집에는 총 4편의 <청춘> 연작이 있다. 그만큼 ‘청춘’은 그녀 삶 전반에 아주 큰 영향을 끼쳤다. 마냥 행복하고 밝지만은 않다. 외려 쓰렸기에 그녀가 ‘청춘’을 3권의 시집을 걸쳐 논한 것일지도 모른다. 필자는 4편의 연작을 읽어보면서 어느덧 <청춘>이 시인이 표현하고자 했던 사랑의 한 형태라는 느낌을 줄곧 받았다.
그녀는 청춘을 “조심할 수 없는 시기”라고 표현했다. 삶의 모든 것이 허무했고, 불의로 느껴졌으며, 그래서 조심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것은 인생의 전반을 뒤흔들었다. 완전한 청춘은 모순된 개념이다. 그럼에도 사랑했다. 사랑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리고 그녀의 삶은 온 청춘으로 번진다. 어느 순간 사라지더라도 냄새는 오래도록 그곳에 남아있다. 그렇기에 청춘은 시인의 자의식이자, 삶이다. 이것이 ‘사랑’이 아니면 무엇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겠는가? 우리가 고통받는 이유도 결국 나 자신과 타인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소금 그릇에서 나왔으나 짠맛을 알지 못했다/ 절여진 생선도 조려놓은 과일도 아니었다/ 누구의 입맛에 맞지 않았고/ 서성거렸다, 꽃이 지는 시간을/ 빗방울과 빗방울 사이를/ 가랑비에 젖은 자들은 옷을 벗어두고 떠났다/ 사이만을 돌아다녔으므로/ 나는 젖지 않았다 서성거리며/ 언제나 가뭄이었다/ 물속에서 젖지 않고/ 불속에서도 타오르지 않는 자/ 짙은 어둠에 잠겨 누우면/ 온몸은 하나의 커다란 귓바퀴가 되었다// 쓰다 버린 종이들이/ 바람에 펄럭이며 날아다니는 소리를/ 밤새 들었다

「청춘 1」 전문


맞아 죽고 싶습니다/ 푸른 사과 더미에/ 깔려 죽고 싶습니다// 붉은 사과들이 한두 개씩/ 떨어집니다/ 가을날의 중심으로// 누군가 너무 일찍 나무를 흔들어 놓은 것입니다

「청춘 2」 전문


온전히 그 의미를 다 알 수는 없더라도 전체적으로 화자의 심정이 불안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두 편의 시는 바로 시인의 첫 시집에 실린 청춘 연작이다. <서성거리며> <가뭄이었다> <짙은 어둠> <죽고 싶습니다> 등 가슴 뛰는 제목과 다르게 불안정하고 부정적인 시어가 사용되어 우울한 내용이 전반이다. 시인은 청춘의 20대를 바쁘게 공부하며 보냈는데, 원래도 유약했던 그녀는 서른 살이 되자 죽기 직전까지 아팠다고 한다. 그 시기에 그녀는 꿈만 꾸던 시인이 되기로 결정한다. 그리하여 유독 시인의 초기 시는 적적하고 혼란스러우며, 결연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듯하다.
 

출구든 입구든/ 주황색 초벌칠이 가장 아름다운 철문들// 날아오는 돌멩이들 속에서/ 피어나던 빨간 유리 튜울립// 상처 난 이마 밝고 가던/ 꿈의 부드러운 팔꿈치// 기억한다// 불타는 얼굴을 묻기 위해 달려갔던/ 투명한 두 개의 빙산, 너의 가슴/ 눈보라와 박하향기가 휘몰아치던 곳

「청춘 3」 전문


그러던 시인은 어느덧 그냥 좋아하는 것을 좋아하는 만큼만 하라고 이야기하는 선생이 되었다. 청춘이란 매혹적인 것을 쫓고, 후회 없이 좋아하는 것에 순간을 다하라고 말한다. 허무한 삶의 연속에서 가장 젊고 아름다운 청춘일 때만큼 열정적일 수 있는 시기가 있을까? 어떤 경험을 하고 어떤 기억을 가지느냐에 따라 삶의 냄새는 달라진다. 과거의 상처는 어느새 아물어 또 다른 나의 힘이 될 수 있고, 뜻깊지 않다고 생각했던 경험은 예상치 못한 기회에 결정적으로 쓰일 수도 있다. 청춘은 그렇다. 그녀는 비록 <눈보라와 박하향기>가 휘몰아쳐도, <빨간 튜울립>은 굳게 피어나는 그것이 청춘이라고 말하고 있다.
 

자신의 핏속에서만 용감하게 달리던 흑기사가 있었다/ 그때 아홉 개 조각난 얼음에 찔린 듯/ 그때 뜨겁고 붉은 입속에서 찌르던 것들 사라졌다/ 말할 것이 많았다 말할 것이/ 없었다/ 모든 것은 행동으로 환원되었다// 검은 벽/ 검은 별과/ 검은 병이 뒤척이던/ 향기 나는 몸뚱이의 지진// 그때 모든 이들은 노래할 이유가 없었으므로/ 그때를 향해 가수의 입술은 피어나고// 우리는 지나간 허기에 대해/ 닫힌 대지처럼 굳게 입을 다문다

「청춘 4」 전문

 

드디어 청춘 4편이다. 이것이 마지막일지 아닐지는 모른다. 그러나 시인은 이제 청춘을 그만두고 싶은 것일까. 「청춘 4」의 메시지는 한 번에 와닿지 않는다. 잠시 「청춘 4」에 대한 시인의 말을 빌리자면, “신체의 변화를 받아들이지 않는 게 자기 삶의 어떤 부분을 회피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고 그래서 나는 인생에서 일어나는 변화를 놓치고 있다. 무언가를 포기하고 그 새로운 변화에 집중하고 싶다”라고 했다. <향기 나는 몸뚱이의 지진>은 이러한 ‘변화’를 이야기 한 것일까.
 

판잣집이 젖니처럼 빠지고 붉은 달 위로 던져졌다/ 피와 검댕으로 얼룩진 술병이 흰 비탈에서 굴러온다/ 첫 시집의 변치 않는 한 줄을 마지막 시집에 넣어야 할 것 같다/ 청춘은 글쎄……가버린 것 같다

「이 모든 것」 부분


시인이 이러한 변화를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은, <청춘> 연작을 쓰면서 성장한 그녀 자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성숙한 태도는 결코 처음부터 몸에 배지 않는다. 3권의 시집을 걸친 <청춘>이다. 이 중에 완벽한 청춘은 결국 없었다. 그것은 갈수록 흐려졌고 성숙이 밴 몸은 그것으로 청춘이 아니었다. 위는 「청춘 4」와 같은 시집에 있는 시이다. 마지막 구절은 영원할 줄 알았던 청춘도 시인의 세계에서는 막을 내린 것을 암시하는 듯하다. 비록 삶의 한 시대는 저물었지만, 그것은 이전의 것을 기반으로 한 또 다른 변화의 시작이기에 절망적으로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 그녀는 유동적인 시인이다.
말하자면 ‘청춘’은 시인의 정체성이었다. 시인이라는 직업은 정체성이 상당히 중요하다. 소속에 대한 갈등, 자아의 분열, 정체성을 찾기 위한 탐구의 과정은 모두 시의 소재가 되며 시인의 감각이 된다. 시인은 시에 거짓말하지 않는다. 성장과 변화가 온전히 쓰인 시는, 그것을 읽는 사람에게도 교훈을 남긴다. 비록 청춘은 절필했지만, 그녀가 남긴 청춘의 불안정은 또 다른 청춘들에게 위로와 공감이 될 것은 분명하다. 이처럼 정체성에 대한 고민을 아끼지 않는 그녀에게 ‘여성’은 또 무엇이었을까.


3. 관능의 미학

진은영은 ‘여성’이다. 그녀는 ‘여성 시인’으로서 자신이 어떤 시를 써야 하는지 늘 헤아리고 있었다. 여성이 이 세상에 나와 사회로 진출해 남성과 동등하게 참정권을 얻게 된 역사는 그리 길지 않다. 21세기엔 차별받지 않을 평등한 권리가 어떤 특성을 막론하고 인간에게 부여되었지만, 아직 전통적인 권력 구조는 엄연히 자리를 지키고 있다. 이는 문단에서도 마찬가지였는데, 지식인이라 말할 수 있는 ‘시인’의 길을 걷는 진은영에게도 적용되었기 때문에 ‘여성’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찌 보면 ‘여성’ 시인이라는 수식이 또 다른 프레임일 수도 있지만, 그럼에도 여성이기에 해야만 하는 과제가 아직 많이 남아있다. 시인은 여성의 입으로 지적인 목소리를 내는 게 힘들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경험이 있다고 한다. “여성들이 감성적인 목소리를 내면 남성들이 그렇게까지 난폭하게 반응하지 않는데, 지성적인 목소리를 내면 못 견디는 것 같다.” 사회는 여전히 여성에게 원하는 ‘이상’이 있고, 듣고 싶어 하는 목소리는 상당히 제한적이다.


서툰 몸짓을/ 이사 가는 날을 좋아해/ 죽은 사람의 아무렇게 놓인 발들의 고요를/ 그위로 봉긋하게 솟은/ 공원묘지에 모여든 초록 유방들/ 산자의 기침과 그가 빠는 절망의 젖꼭지를/ 좋아해

「무질서한 이야기들」 부분


네가 소년이었을 때/ 네가 따준 자두를 먹고 싶었을 때/ 검은 물방울무늬 원피스 아래 돌처럼 무거운 가슴이 없었을 때// 소녀가 소녀를 사랑했을 때/ 소년이 소년을 사랑했을 때

「네가 소년이었을 때」 부분


나무도마 위의 칼자국처럼 갈라진 농부의 이마/ 비릿하게 항구의 푸른 젖가슴에서 발려나간/ 어부의 차가운 돛대/ 슬픔의 살찐 넓적다리를 파고드는/ 달콤한 폭력이 또다시 필요할지도!

「문학적인 삶」 부분


하얀 소녀의 가슴처럼 머뭇거리며/ 조금씩 볼록해지는 의문들

「나에게」 부분


그래서 시인은 유독 특히 전통적인 용어에 새로운 의미와 시선을 부여하곤 하는데, 이곳에서 그녀가 여성의 ‘성’과 ‘본질적 욕망’, 그리고 ‘신체’를 서슴없이 이야기하고 싶어 한다는 것이 드러난다. 일반적으로 여성의 ‘가슴’은 어머니에 대한 회귀라던가, 남성들에 의해 대상화되어 성적인 요소로 쓰이곤 한다. 시인은 이러한 전통적 관념에서 벗어나 여성이 여성의 신체에 대해 어떻게 서술할 수 있는지 꾸밈없이 보여준다. 그녀는 여성이든 남성이든 자기 성의 신체에 대해 말하는 일이 주는 독특성이 있다며 신체 자체에 대한 아름다움을 논한다. 그 영감은 앨런 긴즈버그(Allen Ginsberg)의 <니일, 젊은 애인의 죽음>이라는 동성 애인의 죽음을 슬퍼하는 여덟 줄짜리 짧은 시에서 받았다고 한다. 앨런 긴즈버그는 스무 살도 안 된 청년이었던 애인이 죽은 이후에, 그 죽음을 슬퍼하면서 그의 육체의 부분들을 다 호명하는 시에 강렬한 감명을 받아 ‘신체’에 대한 새로운 사고를 하게 된 것이다.
실로 그렇다. 일각의 여성 운동가들은 “내 몸은 나의 것!”이라고 말하며 성폭력을 근절하기 위해 시인의 의도와 비슷한 목소리를 내곤 한다. 근본적인 성폭력의 원인 중엔, 여성의 몸을 지나치게 신비스럽게 여기는 미디어의 영향도 있다. 여성의 몸이 대중적인 미디어에서는 섹슈얼하고 금단의 것으로 여겨지며, 여성 본인이 성적인 발언을 하는 것은 ‘밝히고’ ‘가볍다’라는 이미지를 양산 시킨다. 그러나 어떤 성별이든 우리에겐 ‘몸’에 대해서 자유로울 권리가 있다. 그녀의 시에는 이렇게 오래된 것들을 타파하고자 하는 의식이 이리저리 묻어있다. 그녀는 시어 그 자체의 의미에 주목했고, 나아가 외려 ‘가슴’은 일상적인 소재로 느껴지기도 한다.


소년이 내 목소매를 잡고 물고기를 넣었다/ 내 가슴이 두 마리 하얀 송어가 되었다/ 세 마리 고기떼를 따라/ 푸른 물살을 헤엄쳐갔다

「첫사랑」 전문


입 벌린 조가비의 분홍빛 혀 속에 깊숙이 집어넣었던/ 하얀 발가락으로/ 우리는 세계의 배꼽 위를 걷는다// 그리고 우리는 서로의 존재를 포옹한다/ 수요일의 텅 빈 체육관, 홀로, 되돌아오는 샌드백을 껴안고/ 노오란 땀을 흘리며 주저앉는 권투선수처럼

「연애의 법칙」 부분


이는 관능의 시선으로 번지게 되면서, 시인이 보여주고자 하는 사랑까지 헤아릴 수 있게 된다. 사랑을 표현한 시의 단어엔 외설이 없다. 그러나 노골적이지 않은 표현이 독자에게 ‘연상’을 불러온다. 이처럼 여성 화자가 성을 이야기한다고 해서 그것이 늘 저급하지만은 않다는 걸 시인은 보여준다. 우리의 사회 역시 이러한 변화가 필요하다. 모든 사람이 자신의 신체에 대한 사랑을 갖고 대담해지는 것이다. 이와 같은 인식이 자리한다면, 저마다 다양한 방식으로 건전하고 고귀한 사랑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 주머니에 있는 걸 다 줘 그러면/ 사랑해주지, 가난한 아가씨야// 심장의 모래 속으로/ 푹푹 빠지는 너의 발을 꺼내주지/ 맙소사, 이토록 작은 두 발/ 고요한 물의 투명한 구두 위에 가만히 올려주지// 네 주머니에 있는 걸, 그 자줏빛 녹색주머니를 다 줘/ 널 사랑해주지 그러면// 우리는 봄의 능란한 손가락에/ 흰 몸을 떨고 있는 한그루 자두나무 같네// 우리는 둘이서 밤새 만든/ 좁은 장소를 치우고/ 사랑의 기계를 지치도록 돌리고/ 급료를 전부 두 손의 슬픔으로 받은 여자 가정부처럼// 지금 주머니에 있는 걸 다 줘 그러면/ 사랑해주지. 나의 가난한 처녀야// 절망이 쓰레기를 쓸고 가는 강물처럼/ 너와 나, 쓰러진 몇몇을 데려갈 테지/ 도박판의 푼돈처럼 사라질 테지// 네 주머니에 있는 걸 다 줘, 그러면/ 고개 숙이고 새해 첫 장례행렬을 따라가는 여인들의/ 경건하게 긴 목덜미에 내리는// 눈의 흰 입술들처럼/ 그때 우리는 살아있었다

「훔쳐가는 노래」 전문


또한, 그녀의 시는 때때로 시적 화자의 성별이 모호해지곤 한다. 예컨대 위 시의 화자는 대상을 거칠게 ‘아가씨’라고 부르고 있다. 사실 ‘아가씨’는 낡은 단어에 속한다. 주로 남성이 젊은 여성을 낮게 지칭하며 이르는 말이다. 시인은 낡고 때 묻은 단어들을 시적인 공간으로 가져와서 새로운 느낌을 주는 일에 관심이 많았다고 한다. 단어를 시 안으로 끌어와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고, 편협 적으로 쓰이고 있는 단어들의 느낌을 깨고 흐트러뜨리는 게 시인의 역할이라고 생각했기에 ‘아가씨’라는 단어 역시 외려 여성 시인이 사용함으로써 이전의 것과 다른 새로운 시적 분위기를 형성한 것이다. 특히 성차를 확정하고 비교할 필요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이를 흐트러뜨려 생물학적 성과 사회적 성의 간극이 조금 더 근원적으로 탐구될 필요도 있다. 여성과 남성은 분명히 다르지만, 생물학적인 차이와 달리 일반적인 이미지의 ‘여성스러운’ 것과 ‘남성스러운’ 것의 기준은 고정적인 사회에 의해 규정되어왔다. 그렇다면 그 경계가 모호해지는 세상은 어떻게 될까? 갑자기 모든 질서 규범이 무너지며 혁명이 일어날까? 단지 기존의 사고가 조금 뒤틀릴 뿐이다. 시인은 아마 이것을 의도했을 것이다.
「훔쳐가는 노래」를 읽다 보면 우리가 살아가며 타인에게 무엇을 훔치고, 무엇을 훔쳐지는지에 대한 고찰을 하게 된다. 인간은 혼자서 살 수 없는 ‘사회’적 동물이다. 그래서 정치가 필요하고, 살아가기 위한 지혜를 철학에서 얻는 것이다. 그녀는 이처럼 늘 삶의 감각을 찾아 헤맸는데, 이러한 사유 역시 시에서 가감 없이 드러내고 있다. 문학과 정치 사이의 고민, 그리고 자신 삶의 감각을 더듬으면서 꾸준히 현실의 파열에 외치는 시를 쓰고 있다. 다음 장에서 이러한 그 외침은 무엇인지 조금 더 깊이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4. 시적이고 철학적인 자전

니체 철학을 오랜 시간 공부하며 자의식을 다진 그녀를 흔히 아름답고 정치적인 시인이라고 이른다. 시인은 자아와 외부 공간의 이동에 꽤 자유롭다. 시 속으로 외부의 것을 들여와 자신의 언어로 다진 후 어느새 하나의 시로 만든다. 그것은 전통적 관념이기도 하고, 사랑이기도 하며, 정치이기도 하다. 그리고 자아는 곧 외부 세계와 자주 연관된다. 이 장에서는 그녀의 시적 정치성과 철학에 대한 사조를 살펴보고, 그녀가 이제까지 시에서 언급했던 모든 주제를 망라하여 그녀가 드러내고자 했던 ‘자의식’은 무엇인지 이야기할 것이다.
 

엘뤼아르보다 박노해가 좋았다/ 더 멀리 있으니까/ 나의 상처들에서// 연필보다 망치가 좋다, 지우개보다 십자나사못// 성경보다 불경이 좋다/ 소녀들이 노인보다 좋다// 더 멀리 있으니까// 나의 책상에서/ 분노에게서/ 나에게서// 너의 노래가 좋았다/ 멀리 있으니까// 기쁨에서, 침묵에서, 노래에게서// 혁명이, 철학이 좋았다/ 멀리 있으니까// 집에서, 깃털 구름에게서, 심장 속 검은 돌에게서

「그 머나먼」 부분

 

그녀의 자전과 내면을 헤아리기 위해서는 그 주변 세계 중 하나였던 철학에 대한 사조를 사전에 이해할 필요가 있다. 위 시는 그녀가 철학이 좋은 이유를 직접 언급한 시다. 위 시는 별다른 비유가 사용되지 않았다. 사물과 개념이 서로 비교되다가, 어울리지 않고 유추하기 쉽지 않은 단어에 ‘-에게서’라는 조사가 쓰인 표현을 반복하면서 앞서 언급한 개념이 확장되는 느낌을 준다. 비교되는 개념과 확장되는 장소가 왜 함께 묶였는지 가시적으로 파악하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가 좋았다/ 멀리 있으니까/ -에게서’의 문장 구조가 반복되기에 시는 오히려 단순하거나 복잡하지 않고 조화로워 보인다. 따라서 비유는 사용되지 않았지만, 단어들의 조합은 일종의 메타포라고도 할 수 있겠다.
이 모든 것이 좋은 이유, 특히 시인이 철학을 좋아하는 이유는 그것이 <집에서, 깃털 구름에게서, 심장 속 검은 돌에게서> <멀리> 있었기 때문이다. “삶은 너무 구체적이고 적나라하고 노골적이다. 그러나 철학의 개념이나 어휘는 현실로부터 어떤 거리를 둔 개념어들이다. 섬세하고 순수하게 정제해낸 언어로 세계를 구성해서 사유하는 방식은, 허덕거리는 고통에서 거리를 유지하는 효과가 있는 것 같다”라고 하며 그리고 “그 거리를 갖게 되면 세상을 다른 방식으로 볼 수 있고, 그게 없었다면 불행함 속에서 허덕이기만 했을 것 같다”라고 시인은 말한다. 보통 철학은 인간과 주변의 것을 탐구한 생각의 집합이기 때문에, 삶의 지혜를 제공하며 인간은 끊임없이 이성을 통해 철학적으로 사유한다. 따라서 인간에게 있어 가까운 학문이라는 정설과 다르게 시인은 반대였다. 멀리 있기에, 현실에 거리를 둔 철학이 좋다고 밝힌다.
 

낡은 선반 위에서는/ 여수 출입국 보호소 화재로/ 사과와 별을 싼 종이냄새가 났었다/ 이주노동자 10명 사망, 17명 부상/ 사과와 별을 싼 종이냄새가 났었다/ 보호 외국인의 도주를 우려해/ 숨겨놓은 얇고 구겨진 파란 종이를 풀며/ 쇠창살 문 개방 지연, 감금된 채/ 숨겨놓은 얇고 구겨진 파란 종이를 풀며/ 노동자들 연기에 질식 사망

「Quo Vadis?」 부분


푸른장미/ 꽃봉오리 터지는 소리가/ 폭탄처럼 크게 들리는 고요한 시간에/ 당신과 입맞춤하고 싶다./ 학살당한 손들이 치는 다정한 박수를 받으면서. // …(중략) 지나가는 은빛 물고기에게,/ 학살자의 나라에서도/ 시가 씌어지는 아름답고도 이상한 이유를.

「러브 어페어」 부분


「Quo Vadis?」는 시의 구성 방식이 상당히 독특하다. 두 개의 이야기가 번갈아 가며 중첩되고 있다. 이는 ‘여수 출입국 보호소 화재’ 사건의 정황을 단지 시의 형태로 말하고 있을 뿐이다. 중간의 얇은 글씨로 된 이야기는 단지 시를 위한 장치일 것이다. 시의 제목은 라틴어로 “어디로 가시나요?”라는 뜻이다. 정치적 사건을 언급하며 그녀는 누군가에 “어디로 가냐”고 순수히 물은 것일까, 아니면 한탄한 것일까. 시에서는 해결책이나, 어떠한 방향성도 제시되지 않지만, 정치적 어폐를 시로 명명하면서 이 사회가 어디로 가냐고 묻고 있는 듯한 메시지를 읽을 수 있다. 「러브 어페어」는 <폭탄> <학살당한 손> <학살자의 나라>라는 시어와 결합 되며 문득 섬뜩한 분위기가 연출 된다. 그러한 나라에서도 사랑은 하고 있고, 시는 씌어 진다. 끔찍한 현실에도 예술과 사랑은 영생한다는 것일까. 분명한 것은 작품 자체에 대한 자세한 분석 없이도, 위 두 편의 시를 보면 시인은 시 곳곳에 현실적 감각 역시 시에 흐트러뜨려 놓는 도전을 했다는 것을 파악할 수 있다. 이것이 전적으로 정치적이라고 말하긴 어렵지만, 시인은 내면의 심리 탐구뿐만 아니라 외부 세계에 대한 고찰 역시 아끼지 않았다.
이제껏 여러 주제의 시를 살펴보았는데, 그녀의 시는 당돌하기도 하며, 때로는 감각적이기도 하고, 교묘하며 직설적이기도 하다. 경계선은 모호하고, 사고의 이동은 자유롭다. 시인의 온 시가 통일성이 없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추구하는 형식은 없어도 말하고자 하는 것에 솔직하고, 표현이 덤덤하기보단 늘 진한 색과 아름다운 시어가 존재한다. 보이지 않는 생각과 추상적인 감각, 그리고 풍경을 언어로 써내는 그녀의 작업은 그 자체로 예술이다.
 

아담. 언 호수 밑엔/ 첫 번째 도시가 있어/ 얼어가는 물고기/ 회색 벽이 내뿜는 물방울을 먹는다/ 그 물고기의 이름은?// 불타는 지느러미/ 나는 시인입니다/ 다른 이름으로 부르지 마세요/ 듣기 싫어요/ 나는 불타버린 지느러미를 휘젓는다

「Summer Snow」 부분

 

“진리는 낡아빠진, 그리고 감각적인 힘을 상실한 은유들이다.” 니체의 말이다. 이 시의 서두에 인용된 문장이다. 어떠한 진리든 ‘나는 시인입니다/ 다른 이름으로 부르지 마세요’라는 포부를 가진 시인에게 저항할 수 없을 것이다. 진리는 고정적이지만, 시인은 어떤 형태로든 나아갈 수 있다. 단지 낡고 오래된 은유일 뿐이다. 절대적인 고정관념에서 벗어날 때, 우리는 비로소 자유로워진다. 시인의 시는 그러한 의도를 품고 있다. 그리고 그녀가 좇는 현실이라는 것은 비극일 수 있어도, 그 현실에서 삶의 미학을 찾아 희극을 살아야 하는 것을 깨닫게 해준다. 한마디로 그녀의 시를 말하고 싶다. “현실 속 미학을 찾는 청춘의 언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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