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lum

가족과 강릉

silin.inspo 2020. 12. 26. 17:42

여행을 떠날 수 있는 것은, 행운이다. 일상을 잠시 잊고 완전히 다른 공간으로 갈 수 있는 시간이 있다는 말이기 때문이다. 치열함에 쫓기는 현실 속에서 여행은 완벽한 휴식이 될 수도 있고, 혹은 이전까지 해오던 것을 모두 던지고 완전히 새로운 것을 시작할 수 있는 인생의 전환점이 되기도 한다. 그렇기에 기행문들이 쏟아져나오는 것이 결코, 의미 없는 일은 아니라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해외여행이나 호화로운 여행을 제대로 떠나본 적이 없었다. 물론 ‘진정한’ 여행을 그렇게 외적인 요소만으로 판가름할 수 없음은 분명하다. 나의 부모님은 일상을 살아가느라 바쁘셔도 가족끼리 보내는 시간을 정말 중요시하셨다. 특히 아빠는 가족의 연대를 정말 사랑하시는 분이라, 몇 년간 캠핑을 일 년에 두세 번씩 꼬박꼬박 데리고 가셨다. 그것도 완전히 동생과 내 위주로 말이다. 무슨 의미냐면, 지루하게 하루종일 텐트에서 시간을 보내는 캠핑이 아니라 수영장, 계곡, 체험 교실, 박물관 등이 있어 재밌게 놀 수 있는 장소로 아빠가 직접 며칠을 찾고 찾은 곳으로 데리고 가신 것이다. 아빠는 회사원이시니까 방학처럼 오랜 시간 휴가를 보낼 수 있는 상황도 아니신데, 분기별로 우리 남매와 시간을 보내기 위해 자신의 휴가를 가족에게 반납하신 것이다.
사실 그 시절에는 그게 마냥 좋지만은 않았다. 가족들과 대화하는 것보다 친구들이랑 메시지 하는 게 더 좋았고, 캠핑은 잠자리부터 먹는 것까지 죄다 손으로 직접 해야 하는 노동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쉬러 가는 여행인데 화장실마저 야외에 있다며 남들처럼 호텔에 가자고 성질을 내기도 했다. 하지만 엄마가 점점 아프시고, 동생과 나도 나이를 먹으면서 캠핑은 자연스럽게 가지 않게 되었다. 이전에는 캠핑 이외에도 국내 곳곳으로 간단히 여행을 다녀 왔었는데, 그마저도 엄마가 아프셔서 못 가게 되었다. 고등학생이 되고 학교생활에 치이다 보니 그 짧은 여행과 철없던 시절에 온전히 가족과 보냈던 캠핑이 그리워지기 시작했다. 아빠가 우리에게 반납했던 시간이 얼마나 소중한 것이었는지 그제서야 깨닫게 된 것이다.
그렇게 내가 고3이 될 때까지 멀리 떠나지 못하고 있던 우리 가족이 내 말 한마디에 바로 강원도로 여행을 떠났다. 입시에 지쳐있던 나는 여름 방학이 되자 아빠께 잠시만이라도 여행을 다녀오자고 졸랐다. 그동안 갔던 곳 중에 강릉이 아주 좋은 장소로 기억에 남아있던 나는 무조건 강원도 바다를 봐야 한다고 이야기하면서 말이다. 그래서 아빠는 정규 휴가도 아닌 주말에 시간을 내셔서, 오랜만에 가족과 다 같이 여행을 떠날 수 있게 되었다. 강원도는 바다, 신선한 해산물 말곤 별거 없는 똑같은 레퍼토리의 여행지라고 이야기할 수 있지만, 그 자체가 매력인 게 강원도다. 이쪽을 보면 높이 솟은 울창한 산이고, 저쪽을 보면 에메랄드빛 바다가 펼쳐져 있다. 그 반대쪽 아파트 숲에서 사는 우리는 매일 볼 수 있는 풍경이 아니었다.
그리고 나는 그 끝을 알 수 없는 새파란 바다 앞에 서서 광활한 자연 앞에서 내가 살아가는 곳이 얼마나 작은 곳인지, 그동안 아주 작은 곳에 갇혀 정해진 일만을 해왔는지 반성했다. 답답했던 마음에 바닷바람이 스치고, 온갖 잡생각을 해변에 두고 올 수 있었다. 입시가 코앞에 닥쳤을 때 보았던 바다인지라, 보는 것만으로 내 생각을 이야기하게 하는 바다의 신비한 힘을 더더욱 느낄 수 있었다. 그렇기에 작년, 날씨가 무척 좋은 날 사랑하는 가족들이 지친 나를 위해 떠났던 강원도 여행이 가장 인상 깊다. 앞으로도 가족들과 또 다른 곳으로 여행을 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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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희대학교 '성찰과 표현' 수업에서 작성한 짧은 수기.
2020.0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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